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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앜쿨] 우리집 인어가.. 1부 04-1

04. 크리스마스


※약 7,700자 분량.






04. 크리스마스

_쿠로오의 눈꼬리가 야살스레 휘었다.




14.

“쿠로오- 여기 와서 앉아.”

아카아시가 소파 뒤편에 서서 쿠로오를 불렀다. 욕실에서 나온 쿠로오는 한 손에 드라이기와 빗을 들고 들뜬 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렀다.

“왜 샤워가운이야? 옷은?”

“어..침대에 놓고 왔어.”

“추우니까 머리 다 하고 바로 갈아입어.”

아카아시가 드라이기선을 콘센트에 꼽으며 말했다. 전원을 켜자 따뜻한 바람이 윙하고 불어나왔다.

“흐아.. 따뜻해..”

쿠로오는 아카아시의 손길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개운한 샤워후에 아카아시가 머리를 말려주는 시간은 쿠로오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중 하나였다.

“쿠로오, 빗.”

“여기.”

물기가 대강 마르자 이번엔 쿠로오가 가져온 중간크기의 빗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내렸다. 슥슥 걸림 없이 매끄럽게 내려가는 빗질에 아카아시의 입가에도 자그마한 미소가 어렸다. 처음 머리를 말려줬을 때에는 한 번 빗어 내리기도 힘들었는데 매일 해주다보니 나름 장족의 발전이 있었다. 다 빗고 나자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스르륵 빠져나 갈만큼 부드러워졌다. 적당히 탄력 있는 머리칼에 반짝이는 윤기가 흘렀다.

아카아시는 쿠로오에게 머리끈을 받아 바로 다음 작업을 시작했다. 그냥 두어도 충분히 잘 어울리긴 했지만 특별한 날이니 만큼 깔끔하게 단장을 하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묶어줘?”

“오늘은 밑에. 헐렁하게 묶을래.”

쿠로오의 요청대로 아카아시는 머리를 모아 아래에 묶음을 잡고 고무줄을 돌려 고정시켰다. 저번에 시내에 나갔을 때 사온 것이었는데 늘 풀고만 다니다가 묶는 것은 좀 불편한지 이렇게 멋을 낸다던가, 시내에 나간다거나 하는 특별한 경우에만 가끔 쓰곤 했다.

“다 됐어. 머리 아프면 얘기해. 오래 버티고 있지 말고. 알았지?”

“응. 그럴게.”

“그래. 가서 옷 갈아입고 내려와.”

쿠로오가 침실로 올라가자 아카아시는 1층 창고 방에 가서 커다란 상자 하나를 꺼내왔다. 크기도 크고, 무겁기도 무거워서 두 팔 가득 안듯이 들어야 했다. 아카아시는 거실 테이블위에 상자를 내려놓고 이번엔 작은 커터칼을 들고 와 포장을 뜯었다. 초록빛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토막토막 분리된 나뭇가지 모형이었다. 생김새를 보니 전형적인 크리스마스 트리용 침엽수를 본 딴 것이었다.

아카아시는 같이 들어있을 안내서를 찾아 박스를 뒤졌다. 까슬한 잎 부분에 손등이 조금 따가웠지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한 구석에 박혀있던 설명서를 찾아냈다. 순서대로 쌓아올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 복잡할 것도 없었다.

아카아시는 토막난 나뭇가지들을 하나로 이어 붙여 금세 트리의 모양을 만들었다. 손으로 조금씩 구부려 전체적인 형태를 잡아주고 나니 제법 그럴싸 해보였다.

사실 아카아시가 이렇게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 생각을 한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당연히 쿠로오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혼자 사는 남자가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거하게 챙길 일은 없었다.

몇 일 전부터 쿠로오가 유일하게 접할 수 있는 바깥세상인 TV에서 다가오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특집방송을 많이 해줬다.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드라마에서도 나왔다는 점이 쿠로오의 호기심을 가장 자극했다. 그렇게 크리스마스에 대해 알게 된 후로는 저도 크리스마스를 해보고 싶다며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데 아카아시로서는 거절할 길이 없었다.

“이게 트리야? 엄청 크다..”

옷을 다 갈아입고 내려온 쿠로오가 멀찍이 트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가장 꼭대기 부분이 천장에서 불과 수 센치 떨어져 있어서 전체를 보려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서 있어야했다.

“근데 왜 불빛나는 거 없어?”

“이제 꾸며야지. 상자 안에 장식할거 같이 들어 있을거야.”

“내가 할래!”

쿠로오가 의욕적으로 상자를 뒤지며 말했다. 아카아시의 말대로 상자 안에는 볼이나 꼬마전구들을 비롯해 다양한 장식용품이 들어있었다. 쿠로오는 그것들을 몽땅 꺼내다가 차례차례 트리에 매달기 시작했다.

먼저 색색깔 전구들이 매달린 전선줄과 금색, 은색 반짝이들을 빙 둘러 감고, 종이나 리본 같은 것들도 가지 하나하나에 정성스레 매달았다. 마지막으로 장식한 것은 쿠로오와 아카아시의 이름이 쓰인 큰 양말 두 개였는데 크기가 그리 크지 않아서 트리에 걸기에 딱 좋았다.

“끝-!”

“마음에 들어?”

“응. 예뻐.”

“사진 찍어줄게. 앞에 서봐.”

아카아시가 휴대폰을 꺼내들자 쿠로오가 빠르게 트리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쿠로오가 갈아입고 온 옷은 까만 쫄바지에 널널한 후드티였는데, 빨간색이 화려한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꽤 잘 어울렸다. 무엇보다 루돌프 머리띠가 압권이었다.

“귀여워. 예쁘다.”

연속으로 사진을 찍은 아카아시가 흐뭇한 표정으로 갤러리를 들여다봤다. 슬쩍 살펴본 아카아시의 핸드폰에는 이미 쿠로오의 사진으로 한가득 이었다.

“아카아시도 같이 찍어.”

“그럴까?”

쿠로오와 함께 트리 앞에선 아카아시는 한 팔을 높게 들어 흔히들 말하는 셀카를 찍었다. 두 명의 웃는 얼굴이 카메라 화면 가득히 잡혔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15.

아카아시가 특별히 솜씨를 발휘해 만든 꽁치 가득한 저녁을 먹고, 남은 저녁시간에는 크리스마스 기념으로 영화나 한 편 보기위해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나름 평가가 좋았던 로맨스 작품이라 조금 기대가 됐다.

아카아시는 오랜만에 부엌 찬장에서 투명한 와인잔을 꺼내들었다. 쿠로오가 오기 전에는 언제나 마감이 끝난 뒤의 헛헛함을 와인 한 잔으로 때우고는 했는데 같이 지내다보니 외로움을 탈 틈도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 잔을 꺼내 든 이유는 그냥 특별한 기분을 내고 싶기 때문이었다. 아마 쿠로오가 들떠있어서 그런지 저까지 들뜸이 옮은 듯 했다.

아카아시는 본인의 잔에는 붉은 와인을 채우고 똑같은 잔에 포도주스도 한 컵 가득 따랐다. 저 혼자 먹으면 쿠로오가 필시 궁금해 할테니 혹시라도 술을 먹게 될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쿠로오가 술 먹는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보호자로서 양심에 찔린 탓이다. 성인이 된지 벌써 4년은 지났다고 하지만 그의 눈에는 아직 조금 큰 어린 아이로만 비췄다. 아카아시가 느끼기에 쿠로오는 아직 너무 순진했다.

아카아시는 간단한 군것질 거리와 함께 트레이에 와인잔을 챙겨들고 거실로 향했다. 물론 가는 중에 분위기를 위해 불을 꺼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쿠로오는 덮을 게 필요하다며 2층에서 이불을 챙겨오느라 조금 뒤에서야 도착했다. 미리 불을 꺼둔 탓에 아카아시가 핸드폰 손전등으로 쿠로오가 걸어오는 앞을 비춰줬다.

“영화는?”

쿠로오가 양팔 가득 푹신한 이불을 안고 소파 위에 앉았다. 착착 이불을 펴서 아카아시와 한 쪽씩 나눠덮고 만족스런 표정으로 자연스레 그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쿠로오 오면 보려고 기다렸지..바로 볼까?”

끄덕끄덕. 아카아시 역시 당연하다는 듯 쿠로오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을 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따뜻했다. 쿠로오는 어리광을 부리듯 아카아시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영화는 쿠로오가 포도주스로 달달하게 입을 적시자 바로 시작됐다. 리모컨 버튼을 몇 번 누르는 것으로 굳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영화를 볼 수 있으니 편리한 세상이었다.

“쿠로오, 과일도 있으니까 같이 먹어.”

아카아시가 와인을 한 모금 홀짝이며 말했다. 계속 주스만 먹고 있기에 몸을 위해 과일도 같이 먹었으면 했다.

“아직 배부른데.. 이따 먹을래.”

아까 저녁을 거하게 먹긴 했는지 끊임없이 가동중이던 입이 오랜만에 휴식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주스가 든 와인잔은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영화는 생각만큼 재미있지 않았다. 왜 그렇게 평점이 높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런 로맨스를 좋아하는 쿠로오도 처음에는 좀 집중해서 보는가 싶더니 역시 아카아시와 마찬가지로 이내 흥미를 잃어버렸다.

“...”

조용한 가운데 거실에는 잔잔한 영화 BGM만이 울려 퍼졌다. 쿠로오는 곧 심심한 듯 몸을 꾸물거리기 시작했다. 나름 얌전히 있으려고 참아보려는 모양인데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움찔움찔 거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쿠로오. 그만 볼까?”

“으응..아니..”

“재미없으면 그만봐도 괜찮아.”

“그래도..”

쿠로오는 영화는 끄기 싫은 듯 고개를 저었다. 재미가 없는 건 맞는데 영화는 보고싶었다. 연인사이에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좋아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것을 해야 된다고 했다. 예를 들면 밤늦게까지 영화보기 같은 것. 어제 무심코 돌린 한 TV프로그램에서 주워들은 것이었다.

“...”

다시 재미없는 시간이 반복됐다. 영화는 정말 재미가 없었다. 어떻게든 집중해보려 애를 써 봐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몸이 근질근질 하다못해 이젠 졸리기까지 했다. 배부르고 따뜻하니 노곤노곤 풀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쿠로오가 안간힘을 다해 잠을 쫓는 사이, 영화는 겨우겨우 중반부를 넘어갔다. 길기도 엄청 길었다. 아카아시는 눈꺼풀이 감겨가는 쿠로오를 토닥이며 남은 와인을 마저 마셨다. 조금만 더 토닥여주면 바로 잠에 들 것 같았다.

“쿠로오. 자..?”

“...”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옆에서 고롱고롱하고 작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카아시는 영화를 끄고 조심스레 쿠로오의 머리를 받혀 소파에 눕혔다. 그리고 다 마신 잔을 정리하기 위해 자리를 떴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 끝에 힘을 주고 살금살금 걸음을 뗐다.

간단히 설거지를 마치고, 아카아시는 이왕 일어난 김에 샤워까지 하기로 했다. 오후에 쿠로오가 목욕을 마치고는 바로 트리를 만드느라 별로 씻을 시간이 없었다. 아카아시는 금방 옷을 챙겨 욕실로 들어갔다. 쿠로오도 침대에 데려다줄까 했지만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시 두기로 했다. 샤워를 오래하는 편도 아니었으니 끝나고 같이 올라가면 딱 맞을 터였다.

 


16.

부스럭.

아카아시가 잠시 씻으러 간 사이 이불 속에 파묻혀있던 쿠로오가 인상을 찡그렸다. 선잠이 든 것이라 옆에서 엉덩이를 토닥여주던 따뜻한 게 없어지니 금세 깨버린 것이었다.

“..아카아시?”

쿠로오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 아카아시를 찾았다. 소파에는 없었다. 쿠로오는 몸을 일으켜 거실을 빙 둘러봤다. 하지만 거실에도 없었다.

쏴아아.

깜깜한 거실에 작게 물소리가 들렸다. 안 보인다 했더니 아카아시는 샤워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불을 둘둘 두른 쿠로오는 텁텁한 입안을 헹구기 위해 부엌으로 향했다. 식탁 테이블에는 물이 놓여져 있었는데 물보단 달달한 것이 먹고 싶어 냉장고에 있던 포도주스를 졸졸 따랐다. 아카아시가 보면 분명 마시지 말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안 보니 괜찮을 것 같았다. 보지 못하니 마시지 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얼른 마시고 컵만 씻어 두면 될 것이었다.

꿀꺽꿀꺽 목울대를 타고 포도주스가 시원하게 내려갔다. 아카아시가 나올까봐 급하게 삼키느라 달달함보다는 시원한 느낌이 더 강했다. 그래서 그런지 뒷맛이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했다.

 


17.

수건으로 대충 물기를 닦아 아직은 머리가 축축했지만 드라이기 소리가 시끄러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쿠로오를 2충에 눕혀놓고 다시 말려야 할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간단히 샤워가운 하나만 걸치고 욕실을 나왔다. 습기가득한 곳에서 나오니 온 몸이 개운했다. 거실에 나와 보니 쿠로오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소파에 앉아있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였는데도 그세 깬 모양이었다.

“쿠로오, 시끄러웠어?”

“아카아시..”

아카아시를 본 쿠로오가 종종 걸어와 품에 안겼다. 자다 깨서 졸린 건지 머리를 부벼대며 어리광을 피웠다.

“올라가서 자자.”

아카아시가 나긋이 마주 안아주며 말했다. 꼼지락 안겨오는 체온이 퍽 사랑스러웠다.

“..싫어. 안 졸려.”

“졸린 것 같은....쿠로오, 너 뭐 마셨어?”

쿠로오의 얼굴을 감싸 올리던 아카아시가 훅 풍겨오는 이질적인 냄새에 놀란 표정을 했다. 제 코가 이상해진 게 아니라면 이건 분명 ‘와인’이었다.

“응..? 주스으..”

말꼬리가 늘어지는 걸 보니 얼마나 마신지는 모르겠지만 취한 게 틀림없었다. 졸린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또 사고를 쳤을 줄은 몰랐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쿠로오, 소파에 앉아있어.”

“에..싫어..”

“잠깐만 있어봐.”

아카아시가 찡찡거리는 쿠로오를 잠시 떼어놓고 급히 부엌으로가 와인병을 찾았다. 그리고 한 손에 집어든 와인병은 놀랄 만큼 가벼웠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정말 한 방울 남김없이 비워져 있었다.

아카아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텅 빈 와인병을 쳐다봤다. 이렇게 잘 보이는데 두는 게 아니었는데 제 잘못이었다.

“아카아시, 일루 와.”

아카아시가 빨리 오지 않자 쿠로오가 제 옆 자리를 툭툭 치며 재촉했다.

“하아..쿠로오..”

아카아시가 거실 불을 밝히며 쿠로오에게 다가갔다. 환한 조명 덕에 발갛게 익은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여기 앉아. 빨리.”

“..눈이 풀렸네.”

“아카아시이..”

쿠로오가 옆에 앉은 아카아시에게 칭얼거렸다. 원래도 아이 같았지만 행동이 더 어려진 것 같았다.

“그걸 다 마시면 어떡해. 내일 머리아플지도 몰라.”

“으응..맛있었어.. 아카아시도 줄까?”

“쿠로오가 다 마셨잖아.”

아카아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응..맛있었어..”

“큭큭. 그렇게 맛있었어?”

완전 맛있었어.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되는 양, 귀에 대고 소곤거리는 모양이 우스웠다. 저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는 있을까.

“더 먹고 싶어..”

“안 돼. 지금도 취해서는.”

“안 돼..?”

쿠로오가 처연한 눈빛으로 아카아시를 올려다봤다. 누가보면 못할 짓이라도 시킨줄 알았을 것이다.

“안돼. 다 마셔서 남은 것도 없잖아.”

“먹고싶은데...”

쿠로오가 실망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했다.

“히잉...아카아시 미워.”

잠시 축 처져있는가 싶더니 돌연 볼멘소리를 내뱉은 쿠로오가 고개를 홱 돌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 서러움은 다가진 듯 하던 얼굴은 잠깐 새에 뾰루퉁한 오리입으로 변해있었다.

“아카아시랑 얘기 안 할거야.”

쿠로오가 단호한 표정으로 삐졌음을 선포했다. 아카아시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렀다. 저렇게 귀여운 얼굴로 얘기하면서 협박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지. 하지만 그 다음 쿠로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과 달리 충분한 협박이 됐다. 그것도 엄청.

“..이제 ‘케이지’랑만 얘기할거야.”

쿠로오의 눈꼬리가 야살스레 휘었다.

“..?”

아카아시의 혼란 섞인 표정을 뒤로하고 쿠로오는 소파에서 내려와 푹신한 러그가 깔린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쿠로오?”

아카아시의 부름에도 쿠로오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제 할 일을 했다. 아카아시의 양 다리를 잡아 벌린 쿠로오는 그 사이에 철푸덕 엉덩이를 붙이고 한쪽 허벅지에 몸을 기댔다.

“케이지-”

그리곤 여상한 목소리로 아카아시의 이름을 불렀다. 아니 정확히는 그의 신체 중 한 부위를. 쿠로오의 눈동자가 향하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아카아시의 ‘그곳’이었다.

“케이지..나 오늘 속상한 일이 있었어.”

“...”

“아카아시가 주스를 다 먹어버렸대.”

아카아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제 아래에 진지하게 말을 걸고 있는 쿠로오를 쳐다봤다. 정말 취하긴 단단히 취한 모양이었다.

“나도 먹고 싶었는데..이제 없대..”

“...”

“그래서..밉다그랬어.”

“...”

“근데..이건 비밀인데.. 사실은 조금만 미워.”

이만큼. 쿠로오가 구 손가락으로 제가 말하는 조금을 표현해보였다. 한껏 찡그려진 눈이 정말 ‘조금’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카아시는 그런 쿠로오를 보며 머리가 아픈 듯 이마를 짚었다.

“뭐라고? 너도 미워하냐구..? 아니야. 케이지는 진짜진짜 좋아해..”

쿠로오는 한 술 더 떠서 자그만 손으로 아카아시의 샤워가운 위를 쓰담쓰담 만졌다. 아주 애정 가득한 손길이었다.

“머찐..케이지...”

“쿠로오...그만..”

아카아시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쿠로오를 불렀다. 어딘가 다급한 목소리였다.

“엄-청 많이 조아해.. 어..케이지..”

쓰담거리기를 계속하던 쿠로오가 손을 멈추고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갑자기 왜 툭 튀어나와써..? 아, 케이지도 내가 좋아서..”

“아아..쿠로오, 이리와.”

아카아시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쿠로오를 휙 잡아당겼다. 그리곤 바로 공주님안기로 안아들고 2층으로 향했다. 쿠로오의 고생길이 열릴 순간이었다.





_continued



꽁치빌라 건물주 twitter: @rin_kkong 에스크&리퀘: asked.kr/krn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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