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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구쿠로] 고양이줍이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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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불고기 버거 세트 하나."

'또 왔네.'

약간은 붕 떠있는 속과 달리 쿠로오의 입에서는 '네, 세트 하나 주문받았습니다.'하고 태연한 대답이 나왔다. 계산대 앞에는 쿠로오 또래의 남학생이 서있었는데, 처음 만난 날 이후로 일주일에 두 번씩은 꼭 가게에 들렀다. 어쩔 때는 같은 학교인지 똑같은 교복을 입은 친구와 함께올 때도 있었다.

"테이크아웃이신가요?"

"아니."

또다. 이 남자애가 올 때마다 한결같은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시키는 메뉴. 질리지도 않는지 늘 불고기 버거 세트 하나를 고집했다. 물론 이건 개인의 취향이고 별 문제가 되진 않았다. 다만 나머지 하나는 '반말'이었다. 이건 조금 문제가 됐다. 남자애는 한결같이 시큰둥하고 시니컬한 표정으로, 또 어쩔 때는 실실 웃으면서 반말을 했다. 듣는 사람이 딱 기분이 나빠지는 말투였다.

"벨이 울릴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쿠로오가 내어준 진동벨은 낚시줄에 걸린 물고기마냥 휙 남자애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 모습은 정말이지 플라스틱 벨을 꽉 잡고 놓아주기 싫을만큼 얄미웠다. 쿠로오는 애써 얼굴에 미소를 띄웠지만 속으로는 한 마디 확 질러주고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사실 처음부터 남자애가 쿠로오에게 반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첫 만남부터 대차게 싸우는 바람에 이렇게 된 것이었다. 덕분에 쿠로오는 그 날 매니저에게 주의를 받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잔소리를 듣는 와중에도 억울함에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리고 며칠 뒤부터 남자애는 끈질기게 쿠로오가 아르바이트하는 가게로 찾아왔다. 서로 얼굴 붉히고 싸운 마당에 저같으면 다시는 안올 만도 하건만 질리지도 않았다. 어쩌면 그래서 늘 똑같은 것만 시키는 것일 지도 몰랐다. 괴팍한 성격만큼이나 입맛도 베베 꼬인게 틀림없었다.

남자애의 이름은 '스구루'였다. 그의 친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었다. 아마 스구루는 쿠로오의 이름뿐 아니라 성(姓)도 알 것이었다. 매니저가 버럭 풀네임을 부르며 그 앞에서 머리숙여 사과하라고 시켰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만족스럽게 웃고 있는 그 앞에서 사과해야 한다는 사실도 분해죽겠는데 제 성마저 까발려지니 알몸으로 벌거벗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저는 스구루의 성조차 모른다니 이건 불공평했다. (심지어 그는 매니저 앞에선 순한 양이라도 된 듯 괜찮다며 도리어 사과를 해왔다. 웃기지도 않지만 덕분에 매니저는 스구루가 친구라도 데리고 오는 날엔 서비스를 내어주며 무척이나 반겼다.)

그 후로는 똑같았다. 매번 이마에 참을 인자를 세 번씩 새기며 주문을 받고, 만들어진 햄버거를 건네줄 때에는 눈 딱 감고 머리 위에 갈아엎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의 머리카락에서 탄산가득한 콜라가 주르륵 흘러내리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지만 아쉽게도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스구루가 저를 놀리듯 대해도 햄버거에 들어갈 피클 갯수를 늘리는 것 외에 쿠로오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스구루는 햄버거를 먹을 때마다 피클은 미리 빼내고 먹었다. 한 번은 캡사이신 핫소스를 잔뜩 넣었다가 바로 매니저에게 클레임을 넣으려던 것을 간신히 뜯어말렸다.)

마음에 안 들었다. 꼭 스구루가 아니더라도 진상고객은 차고 넘쳤다. 굳이 이렇게 나서서 쿠로오를 괴롭히지 않아도 충분히 일은 힘들었다는 얘기다. 이러다 도발에 참지 못하고 폭발해버리면 또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게 될까봐 그가 올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드는 기분이었다. 정말이지 마음에 안 들었다. 아마 이 때가 딱 5월 초나 되었을 것이다.


***


시간이 지나고, 덥다 못해 뜨거운 햇볕에 땀이 죽죽 흐르는 8월이 되어 뜻밖의 일이 터졌다. 여름의 정신나간 열기가 두 사람의 뇌를 녹여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쿠로오는 고이 지켜왔던 순결을 한 순간에 빼앗기고 말았다. 아니, 빼앗겼다라는 말에는 어폐가 있다. 그냥 쿠로오도 정신이 없었다.

"언제 왔어?"

"아까."

스구루와는 미운 정이 들대로 들었다. 눈떠보니 그의 성(姓)을 알았고, 또 눈 떠보니 주소록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스구루는 부활동으로 배구부의 주장을 맡고 있었는데, 아르바이트가 비는 날에는 종종 구경을 갔다. 본인 입으로 자랑아닌 자랑을 해서 그렇지, 근처의 다른 학교와 견주어봐도 절대 실력 없는 팀은 아니었다. 한 가지, 처음에 팀 스타일을 잘 모를 때에는 그의 플레이를 보고 쯧쯧 혀를 찬 것은 스구루에겐 비밀이었다.

"언제 끝나?"

"왜."

"난 언제 끝나냐고 물어봤거든?"

"그러니까 왜. 심심해?"

연습경기를 마친 스구루가 체육관 밖으로 나왔다. 쿠로오는 들고 있던 문제집을 내려놓으며 스구루를 올려다봤다. 에어컨 빵빵한 실내에 있으면서도 온 몸이 땀범벅이었다. 

"더워서 가려고."

"쯧, 누가 밖에 있으래?"

스구루가 목에 두른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옆에 앉았다. 머리카락도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아, 떨어져. 땀냄새 나."

"뭐래."

스구루는 드링크 통을 열어 급하게 음료를 들이켰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위아래로 왔다갔다했다. 어지간히도 목이 탄 모양이었다. 입술이 버석해보였다.

"줘?"

너무 빤히 보고있었나보다. 스구루가 한 손으로 물방울이 뚝 떨어지려는 입술을 훔치며 드링크를 건넸다. 딱히 먹고 싶어서 본 것은 아니었는데, 맛이 어떨지 궁금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모금 삼키니 익숙한 맛이었다. 조금 싱겁긴 하지만 비누색 이온음료맛이 났다.

"별로네."

좀 더 단 맛이 나는 편이 좋았다. 밍밍해서 영 맛이 없었다. 시원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을텐데 온도도 미직지근해서 메리트가 없었다. 그나마 목이 엄청 마르면 괜찮을 것 같았다.

"자."

미련없이 물통을 돌려주었다. 한 모금 이상은 마시고 싶지 않은 맛이었다.

"..."

잠시 아무말 없이 앉아있었다. 남들이 보기엔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 싸우는 것처럼 보여도 사실 둘만 같이 있을 때는 그다지 말이 없었다. 운동장 너머로 지나가는 자전거 바퀴소리가 들릴 만큼 편안하고, 조용했다. 물론 우렁찬 매미소리에 덮혀 실제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그렇다는 얘기였다. 

입을 열면 서로 피곤하고 시끄러워질 것을 아니까 무의식적인 나름의 배려인지도 몰랐다. 아니면 더운 날씨탓이 더해졌을 수도 있었다. 그래, 그건 좀 맞는 소리였다. 날씨의 탓도 확실히 있었다.

"너무 오래 있는 거 아니야?"

넌지시 물어봤는데 대답이 없었다. 갑자기 입안이 썼다. 밍밍한 드링크를 다시 마시고 싶을 지경이었다. 알 수 없는 스구루의 반응에 공기가 텁텁해졌다. 너무 오래있었다. 

불안하게도 왜인지 오늘의 날씨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손발을 열기에 지쳐 처지게 만들어야 정상인데 허리에, 척추에, 발가락에 이상하리만치 꼿꼿하게 힘이 들어갔다. 

아마 스구루도 저와 똑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흰색 페인트라도 들이 부은 듯 서서히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살짝 열린 체육관의 철문 사이로 왁자지껄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동시에 정말 말도 안 되게 눈동자가 마주쳤다. 샤프를 쥐고 있던 손바닥에 쫙 식은 땀이 흘렀다. 그리고 더 말도 안 되게 둘의 입술이 부딪혔다. 버석할 줄 알았던 입술이 물기에 젖어 촉촉했다. 어떤 경로로 몸이 움직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단지 호흡이 멎었고 입술에, 온몸에 열이 올랐다. 더운 날씨의 탓인지, 흥분의 탓인지 더위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입술은 열리지 않았다. 지극히 평화로운 키스에 애꿎은 속눈썹만 바들바들 떨렸다. 쿠로오는 그대로 굳은 듯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던 다리가 저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유일하게 신발 안에 갇힌 발가락만이 더위의 배출구를 찾아 움찔거렸다. 숨이 터질 것 같았다. 둘 중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격렬해서 숨이 가빴다. 정말이지,

새삼스레 말도 안되는 여름이었다.



(2.5 씬부분 생략)



3.

쿠로오는 허리 아래로 축축한 한기를 느끼며 눈을 떴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하늘은 이미 깜깜해진지 오래였고, 거리에는 벌써 가로등 불빛이 켜져있었다. 장대 같은 봄비도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는데 미끄럼틀에서 다리를 내놓고 있던 바람에 바지와 신발이 죄 젖어있었다. 

'또 비야.'

그러게, 또 비였다. 무슨 봄에 이렇게 비가 내리나 싶었다. 이제는 하늘에 마저 따돌림 당한 기분이었다.

쿠로오는 딱딱히 굳어버린 상체를 힘겹게 들어올렸다. 팔뚝에는 닭살이 오소소 돋고, 머리가 웅웅 울리며 지끈거렸다. 속도 안 좋았다. 이제 막 일어났다고 비몽사몽해 할 정신도 없었다. 거지같은 컨디션이 어서 잠을 깨라며 두 뺨을 마구 때렸다.

팔에 안고 잔 짐은 다행히 비에 젖지 않았다. 쿠로오는 입술을 짓이기며 가방을 뒤져 겨울용 외투를 찾아 위에 걸쳤다. 그나마 제일 두꺼운 옷을 빼고나니 가방이 바람빠진 풍선마냥 힘이 없었다.

덜덜덜덜.

외투를 걸쳤어도 차가워진 몸은 쉽게 따뜻해지지 않았다. 왜 이렇게 추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작정 화가 나다 못해 울음이 날 만큼 비가 추웠다. 푹 젖은 발과 다리는 이미 제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손으로 만져봐도 남의 살을 만지는 것마냥 섬뜩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옷을 갈아입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미끄럼틀에서 나가면 또 젖을 터였다.

울컥 쓴 물이 솟았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울음이 났다. 목구멍이 홧홧해지니 머리가 더 지끈거렸다. 어린이용 미끄럼틀에서 자다 일어나선 바지는 오줌 싼 어린 애마냥 쫄딱 젖었다. 거기다 울기까지. 말그대로 최악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니 또 울음이 났다.

'하..읍...'

그 와중에도 꼴사납게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억눌린 '읍읍'소리는 쿠로오에게만 들렸다. 이런 차림새론 찜질방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렇지 않더라도 갈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입을 떼면 속에 있는 것들을 와르르 쏟아버릴 것만 같았다. 안그래도 눈물덕에 시야가 어지러운데 토하기까지 하면 그런 민폐가 따로 없었다.

'흡...'

짓이겨진 입술에선 비릿한 혈향이 났다. 비냄새만으로도 참기가 힘든데 멍청하게도 피까지 났다. 도저히 혼자 있고 싶지가 않았다. 혼자 있을 수가 없었다. 나도 아프다고, 힘들다고 마음껏 어리광 부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정말, 자그마치 22년이었다. 그 오랜 시간동안 아플 때 괜찮냐고 물어봐줄 사람 한 명 곁에 두질 못했다. 비참했다. 유일하게 곁에 있던 할머니는 어리광을 받아주는 존재가 아니었고, 차마 내색할 수도 없었으며 지금에야 곁에 있지도 않았다. 철저하게 혼자된 기분이란 이렇게까지 비참한 것이었다.

쿠로오는 열에 취해, 추위에 먹혀버린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미친 척 걸었다. 비 사이를 걸어가니 이제 외투까지 늘어지게 젖어들었다. 

아무도 없는 공원의 가장 구석까지 갔다. (앞 놀이터)놀이터에는 낡은 미끄럼틀 말고도 예전의 것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공중전화박스였다. 

덜컥-

빡빡한 손잡이를 잡아당기니 은색의 전화기가 쿠로오를 반겼다. 쿠로오는 유리창에 기대, 키패드 옆에 달린 검은색 수화기를 집어들고 어지러운 손으로 차례차례 번호를 눌렀다. 

'010-OOOO-OOOO'

핸드폰이 없어지고 3년이 지났는데도 익숙한 듯 번호를 누르는 손에 망설임이 없었다. 쿠로오가 그간 얼마나 누르고 자우기를 반복했는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었다.

뚜르르르.

무서운 연결음이 들렸다. 부디 받아줬으면 했다. 기억까지 해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와준다면 이 자리에서 정신을 놓고..

“여보세요.”

아, 다행이다. 제일 먼저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 너머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_continued




꽁치빌라 건물주 twitter: @rin_kkong(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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