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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구쿠로ts] 바람꽃 04


※어울리는 bgm을 못찾겠네요;( 잔잔하면서도 산뜻한 사극풍 bgm있으시면 잘 어울릴것 같아요.

※요괴 스구루×인간 쿠로오








八.

창호지 너머로 환한 빛이 아침을 밝혔다. 차가운 공기는 여전했지만 펑펑 내리던 눈과 함께 컴컴했던 하늘은 유난히도 맑게 개어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것이 오후가 되면 바람이 불어 더 추워질 날씨였다.

집을 끼고 돌아 뒤편으로 가면 어린아이 키만 한 작은 계곡이 있었다. 물이 맑고 달아 그럴듯한 식수원이 돼주는 곳이었다. 밤새 내린 눈에 살얼음위로 하얀색이 덮여있어 하마터면 못보고 지나칠 뻔하였다.

툭툭.

남자는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눈 위를 두들겼다. 얕게 언 얼음은 쉽게 금이 갔다. 혼자 흐르던 물줄기에 우수수 눈가루가 떨어져 자취를 감췄다. 투명한 계곡물 아래로 잘게 패인 흙바닥이 드러났다.

체통 없이 쪼그려 앉은 남자의 손에는 짙은 암적색의 산딸기가 한웅큼 들려있었다. 고이 들고온 보자기 안에 있던 것이었다. 남자는 꼼지락 거리며 소매를 잠시 걷어 올렸다. 행여 물에 휩쓸려갈까 너른 손바닥 위에서 조심조심 딸기를 굴렸다. 묻어있던 솔잎, 흙, 먼지들이 하나둘 씻겨나갔다.

남자는 차갑지도 않은지 딸기를 알알이 셀 시간이 되서야 얼음장같은 물에서 손을 건져내었다. 너무 추워서인지, 한참 전에 빨갛게 변했어야할 손가락은 주인을 닮아 덤덤하기만 했다. 물기만 뚝뚝 떨어졌다. 얼핏 고민이 있는 사람처럼 멍하게 보이기도 했다.

딸기가 무르지 않도록 보자기를 조심스레 감싸올렸다. 물에 촉촉히 젖은 탱탱한 산딸기가 붉게 빛났다. 먹음직스러운 자태였다.

발 아래로 사박사박 눈 자국이 남았다. 다시 돌아온 집은 여전히 조용했다. 쿠로오는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듯했다. 남자는 그대로 부엌을 향했다. 말이 좋아 부엌이지 아궁이와 그릇 몇 개가 있을 뿐인 협소한 공간이었다.

하얀 김이 솟는 솥에서 고소한 밥내음이 풍겼다. 어렴풋 풀냄새도 섞인 듯했다. 남자가 준비해두고 간 것 중 하나였다. 다만 솥에서 끓고 있는 것은 밥이 아닌 죽이었다. 무거운 뚜껑을 치우니 희끄무레한 죽이 보글보글 잘도 끓고 있었다.

남자는 바닥에 눌어붙지 않도록 수저를 가져와 휘휘 저었다. 제법 점성이 생긴 듯 했다. 잘게 뭉그러진 밥알사이로 간간히 암녹색의 점들도 보였다. 말려둔 약초를 몇 줄기 부수어 넣었더니 특유의 한방향이 은근히 섞여들었다.

잠시 후, 적당히 밥알이 익자 남자는 평평한 나무판 위에 죽 그릇과 수저, 정체모를 사발을 올려 쿠로오가 자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양손이 자유롭지 못한 탓에 발끝으로 슬그머니 방문을 여니, 사람은 어디가고 왠 솜뭉치 하나가 남자를 반겼다. 습관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남자는 방 모서리에 먹을 것을 치워두고 이불 가까이로 다가갔다. 끄트머리를 찔끔 잡아내리니 아니나 다를까 쿠로오가 불편하게 잠을 청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저절로 혀차는 소리가 나왔다. 편히 자라고 밤새 자리까지 내주었건만 이불 한가운데 쪼그리고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정말 알 수가 없군."

한편 갑자기 밝아진 시야에 쿠로오의 눈살은 작게 찡그려졌다. 짜증도 아닌 힘없이 반응하는 모습에 더 기분이 나빴다. 남자는 속으로 끌끌 혀를 차면서도 그런 쿠로오를 측은히 바라보며 이불을 걷었다. 쪼그려 있는 몸을 살포시 안아 제자리에 뉘이고, 다시 이불을 끌어와 그 위에 덮었다. 엉망이 된 머리칼도 땋은 것을 풀어 한쪽에 모아두니 한결 편해보였다.

남자는 얇은 무지 천을 구해다 죽 그릇 위에 덮었다. 조금 부스럭대면 일어날 줄 알았더니 세상모르고 잠에 취해있었다. 옷 아래로 느껴지던 가냘픈 무게에 억지로 깨우려던 마음은 쏙 들어간 지 오래였다.

남자는 경사진 눈썹을 휘어 쿠로오를 내려다봤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옅게 들렸다. 빨리 일어났으면 했다.

 

해가 머리 위에 걸리기 시작할 무렵이 되서야 굳게 닫혀있던 쿠로오의 눈꺼풀이 떠졌다. 자리가 아늑하고 따뜻한 것이 희미하게 풍기는 투박한 흙냄새도 참 포근했다. 입꼬리가 베시시 올라갔다.

하지만 편안한 기분도 잠시. 푹 자고 일어난 덕분에 정신은 빠르게 깨어갔다. 오랜만의 평화가 안개처럼 흩어질까, 비몽사몽한 정신을 벗어나기 아쉬웠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쿠로오는 느리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최소한의 반항인 셈이었다. 흐릿하던 시야가 점점 또렷하게 돌아왔다. 이불을 걷어내고 어기적어기적 몸을 일으켰다. 눈앞에 보인 것은 낯선 방안의 풍경이었다.

정갈한 나무 책장에 서책이 쌓여있고, 쓰다만 초가 등위에 놓여있었다. 공부하는 서생의 방인지도 몰랐다. 창호지는 햇살을 통과시키느라 밝게 빛났다.

방 한구석에는 꼬깃한 천에 덮인 죽그릇도 있었다. 그릇이 차갑게 식어있는 걸 보면 가져다 놓은지 시간이 꽤 지난 모양이었다. 문득 지금이 몇 시쯤 되었나 생각이 들었다. 아침은 아닌 듯했다.

쿠로오는 한결 개운해진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삐그덕 창호문이 열리고 새하얘진 바깥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시린 바람도 함께였다. 그래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따뜻하게 내리쬐는 햇빛 덕분이었다. 되려 물 한바가지를 끼얹은 듯 상쾌하기까지 했다.

방문 앞에는 쿠로오를 데려온 것처럼 보이는 남자가 누워있었다.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다닐 법한 좁은 마루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한 손은 눈 위로 올려 해를 가리고, 남은 한 손은 긴 담뱃대를 든 채 배위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춥지도 않은지 옷차림은 제법 얇았다. 비단으로 된 도포도 아니고, 누덕누덕 이어붙인 일복도 아니었다. 치렁한 소매와 발목은 끈으로 질끈 동여매고 허릿단도 단단히 묶였다. 움직이기 편해 보이면서도 멋스러움이 살아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 매끄럽게 늘어뜨린 머리칼도 그러했다. 손가락을 뻗어도 잡히지 않을 듯 좌르르 윤기가 흘렀다.

쿠로오는 차마 그 위를 넘어가지는 못하고 방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딱딱한 문가에 머리를 기대고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확신은 없지만 저번에 도와주었던 은인과 이 남자가 같은 사람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뿌듯한 기분이었다.

살랑살랑 바람이 불었다. 쿠로오의 풀어헤친 머리카락이 약하게 흔들렸다. 눈에 비쳐 반사된 햇살에 인상이 찡그려졌다. 몸을 살짝 비틀 때마다 사부작 옷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적당히 춥고, 적당히 조용하고, 또 적당히 평화로웠다. 이런 당연한 생각을 해도 방해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눈동자가 한 곳에 멈췄다. 남자의 가린 얼굴이 궁금했다. 반쯤 드러난 코와 입술은 곧게 뻗어 보기가 좋았다. 쿠로오는 남자가 일어나면 제일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기로 했다. 진부하지만 그만큼 진심이 담긴 말도 많지 않았다.

쿠로오는 남자가 일어나기를 똑같이 기다렸다. 파란 하늘을 보고 시를 가늠해보다가, 이불을 가져와 남자에게 덮어주기도 하고, 휘잉 하고 불어온 바람에 슬쩍 이불을 나눠 덮기도 했다. 이런저런 고민이 많을 것 같았던 머리는 이상하리만치 아무 잡념도 들지 않았다.

그렇게 손끝이 조금씩 붉어갈 때쯤. 마침내 남자가 잠에서 깨어났다.

 



九.

멀뚱멀뚱.

쿠로오는 다시 문 닫힌 방안에 덩그러니 남았다. 남자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일어나더니 쿠로오와 눈을 마주치고 휙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죽그릇을 들고 바로 자리를 떴다. 저를 보고 무슨 말이라도 할 줄 알았는데 조금 당황스러운 기분이었다.

다시 돌아온 남자의 손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그릇이 들려있었다. 데우러 부엌에 갔던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신기한 일이었다. 혼자 사는 이라서 가능한 일인 모양이었다.

“...”

남자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쿠로오는 남자와 죽그릇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눈동자를 굴렸다. 남자의 심기가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원래가 그런 인상인 건지, 잘생긴 얼굴이 아깝다고 진지하게 실없는 생각을 했다.

“저..”

남자가 입을 열 생각이 없어보이자 결국 쿠로오가 말을 붙였다.

“안 먹을 건가.”

쿠로오가 입을 떼기 무섭게 남자가 처음으로 말을 띄웠다. 까딱하게 솟은 눈썹이 보였다. 기다렸다는 듯 말하는 모습에 일부러 그랬나 하는 엇나간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남자는 고개를 조금 갸웃거렸다. 삐딱하게 들었다는 것이 맞을 지도 몰랐다. 쿠로오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불만 섞인 눈초리에 얌전히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눈치는 보였지만 당연히 감사히 먹겠다는 인사말은 빼놓지 않았다.

하얀 죽 위를 살살 긁어 적당히 식은 부분만 걸러냈다. 고소한 밥 냄새가 콧등에 훅 내려앉았다. 쿠로오는 그제야 제가 배고프다는 것을 알아챘다. 어제부터 먹은 게 없으니 당연했다. 사실 제대로 된 밥 한 끼 못 먹은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항상 배가 곪은 상태였다. 고단한 현실에 미처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부드러운 쌀죽은 몇 번 씹을 것도 없이 슬슬 잘도 넘어갔다. 간간이 풀냄새가 섞여들었지만 식욕이 앞서 한입 한입이 모두 달게만 느껴졌다.

쿠로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열심히 죽을 넘기다 남자와 딱 눈이 마주쳤다. 잠시 풀어진 듯 보이던 표정은 눈이 마주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를 찾아갔다.

“..같이 드시겠어요?”

쿠로오가 먹던 숟가락을 어정쩡하게 손에 쥐고 말했다. 부담스러운 눈초리에 갑자기 목구멍이 꽉 막힌 것 같았다. 그런데 와중에도 입안에 침이 고이니 참 곤란한 노릇이었다.

“...”

남자는 다시 입을 꾹 닫았다. 그리고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주섬주섬 손에 챙겨가는 것을 보니 예의 담뱃대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사내였다. 쿠로오는 저가 불편할까 자리를 피해준 것이라 납득하며 다시 수저를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달리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한 그릇 가득 단단히 배를 채우고 나니 수저가 바닥에 부딪혀 깽깽 아쉬운 소리를 냈다. 쿠로오도 덩달아 입맛을 다셨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이라 위장이 놀라진 않았을까 걱정이었다.

쿠로오는 수저를 내려놓고 옆에 같이 놓여있던 사발을 감싸 올렸다. 가까이 코를 대어보니 향긋하고 새콤한 냄새가 났다. 진한 붉은 기만큼이나 달달한 향이었다. 소심하게 혀를 적시니 산딸기향이 물씬 배가 되어 올라왔다. 고소하고 밋밋한 죽 뒤에 훌륭한 입가심거리가 되었다.

점심 아닌 점심을 먹고 난 뒤에는 쭈뼛쭈뼛 나무판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입가가 더러워졌을까 열심히 손을 눌러 닦았지만 붉게 변한 입술은 지우기 어려웠다. 핏기 없는 입술보다는 훨씬 생기가 돌았다.

남자는 어색하게 웃는 쿠로오를 두고 나무판을 뺏어 들어 부엌으로 갔다. 찰박찰박 물소리가 들렸다. 마루에는 주인 잃은 담뱃대가 투그르르 굴렀다.

 

남자의 이름은 ‘스구루’였다. 찡그린 인상을 좋아했으며, 나이는 쿠로오보다 많은 것 같았다. 이 집에서 혼자 산다고도 했다. 쿠로오가 저녁노을이 질 때까지 옆에 앉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스구루는 먼저 아무런 말도 꺼내지 않았다. 쿠로오가 물어보면 내키는 것들만 골라 답을 해줬다. 그래서 저게 전부였다. 조금 답답하긴 했지만 한편으론 안심되기도 했다. 쿠로오의 거취에 대해서, 산에 길을 잃고 쓰러져있던 것에 대해서, 쿠로오에 대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재촉하지도 닦달하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다.

아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왠지 서운했다. 스구루에게 쿠로오는 지천에 널린 눈과 같은 사람이었다. 몸은 좀 괜찮은지 왜 이 추운 산속에서 그러고 있었는지, 하다못해 이름정도는 물어봐줄 수 있는 게 아닌가, 휘청휘청 올라가는 담배연기 옆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어리광도 이런 어리광이 없었다. 쿠로오는 나쁜 사람이었다.






_05편에서 이어집니다.



꽁치빌라 건물주 twitter: @rin_kkong 에스크&리퀘: asked.kr/krn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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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구쿠로ts] 바람꽃 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