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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구쿠로ts] 바람꽃 03


※요괴 스구루×인간 쿠로오 :사극 판타지

※이번 편은 스구루 시점입니다.

※보시다 혹시 틀린 부분 제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六.

톡, 톡.

입안에서 시큼털털한 딸기향이 터졌다. 마음이 급해 색깔이 좀 옅은 것을 골랐더니 아니나 다를까 맛이 좋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인상이 찡그려졌다. 그래도 힘들여 따온 것을 버리긴 아까운지라 최대한 잘 익은 것들을 추려 한 알씩 집어삼켰다. 그나마 까만 것들은 싱겁게라도 단맛이 돌았다.

사부작하고 발밑으로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퍽 여유로웠다. 걸어가는 발걸음이 한량 같아서 일지도 몰랐다. 차림새 상관없이 보노라면 대궐 사는 높으신 분으로 착각할 만큼이나 느긋한 품위가 있었다. 험한 산길을 걸음에도 이만큼의 귀태가 나기란 임금님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겨울의 아침하늘은 언제나와 같이 청량했다.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시큼한 산딸기를 탈탈 털어 먹었다. 손에 옅은 붉은 기가 남았지만 긴 혀로 살짝 핥아먹으니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산딸기보다 붉은 혀는 청렴한 주위와 맞지 않게 지극히도 색정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꽤 오랜 시간 걸어 내려 왔음에도 지친 기색은 없었다. 매일같이 다니던 길이었기에 새삼스러울 것도 없기는 했다. 이 정도 세월이면 숨 쉬듯 자연스레 익숙해지는 일이었다. 거창하게 단련이랄 것도 못되었다.

오늘은 간만에 마실을 나오는 날이었다. 다분히 충동적인 외출이었지만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뭐라도 했으면 싶었다. 아직은 이른 시간에 마을 거리에는 그다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제야 주섬주섬 밭일하러 나가는 농사꾼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산딸기를 더 가져올 것을 그랬나..’

시끌시끌한 장터풍경을 기대했건만 맥이 탁 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 주막에나 들어가 탁주 한 잔 걸치려던 계획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나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조용한 산이나 다름없는 무료한 풍경에 하품이 절로 나왔다. 이래서야 귀찮게 나온 보람이 없었다.

장터거리를 빠져나오니 큰 기와집 몇 채가 줄이어 서있었다. 양반가가 모여 있는 모양인지 하나같이 으리으리한 대문들이 집주인의 신분을 뽐내고 있었다.

‘이 가, 백 가, 김 가..’

대문 옆 문패에는 집주인의 이름이 검은 글씨로 써 있었다. 본성은 기름진 두꺼비 주제에 이름은 꽤나 그럴 듯하게 지어놨구나 싶었다.

양반가 담 사이를 휘적휘적 걸어 다니다 가장 끄트머리에 있는 허름한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띄었다. 집 자체가 허술해 보이진 않았으나 근래에 사람의 손이 타지 않았는지 흙먼지가 뽀얗게 쌓여있었다.

시간 때울 곳도 없던 차에 딱 좋은 은신처였다. 잠이나 한숨 자고 일어나면 적당히 시간은 가있을 터였다. 인적이 드무니 방해받을 일도 없었다.

고민할 것 없이 훌쩍 담을 뛰어넘어 가장 안쪽 방에 자리를 깔고 누웠다. 불을 때지 않아 방바닥은 얼음장 같이 차가웠지만 뉘인 체온도 차갑기 짝이 없어 나쁘진 않았다. 되려 어둡고 축축한 공기는 더할 나위 없을 정도였다.

 

늦은 오후,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왠 고양이 한 마리가 잠을 깨웠다. 어찌나 시끄럽게 울어대는지 창호지를 뚫고 들어오는 곡소리에 멀쩡하던 귀가 다 아팠다. 단잠을 방해한 벌로 꼬리나 콱 물어줄까 싶어 문을 홱 열어 재끼니, 마당에 네 발로 서 있는 조그만 들짐승 하나가 눈에 보였다.

자다 깨 곤두선 신경에 머리를 헝클이며 시커먼 들짐승에게 다가갔다. 털도 새까만 게 못생기기도 못생겨서 성질만 더러웠다. 저보다 몇 배나 큰 몸집이 무섭지도 않은지 도망갈 생각 없이 미야, 미야 울고만 있었다.

“이젠 별게 다 내 잠을 방해하는 구나.”

못난 것. 양 볼떼기를 잡아 죽 잡아당기니 찰진 수수떡마냥 따땃한 살이 늘어지게 딸려왔다. 안 그래도 작은 눈이 옆으로 찢어져 더 하찮아 보였다. 몸통이 비쩍 말라있지만 않았더라면 괘씸한 궁둥이도 한 대 때려줬을 것이다.

“훠이, 저리 가거라. 먹을 것 없다.”

휘휘 내쫓는 손길에도 이 불경한 고양이는 겁도 없이 머리를 비벼왔다. 저 나름 친해졌다고 생각하는 모양인지 시끄럽게 울어댈 땐 언제고 가르릉 애교를 피웠다. 살가운 변화에 허허 너털웃음이 났다.

“못 생긴 게.. 애교는 많구나.”

결국 졸래졸래 옆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고양이를 무시하고 모른 척 목적지를 향해 몸을 돌렸다.


다시 도착한 장터에는 왁자한 말소리가 가득했다. 텅 빈 거리보다는 활기가 넘쳤는데 원래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했기에 썩 좋은 것 같지도 않았다. 아침에야 꿈자리가 사나워 그랬다지만 잘 자고 일어난 지금은 질색이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나왔는지 후회스러움에 눈썹이 찌푸려졌다.

쯧.

참 뭔가가 뒤틀려 맞는 날이었다. 그래도 나왔으니 술은 한 잔 먹을까 싶어 가장 사람이 없는 주막에 들러 막걸리 한 병을 사가지고 나왔다. 진득하니 엉덩이 붙이고 앉아 먹는 것은 당연히 사양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한 손에 막걸리 병 주둥이를 쥐고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고 마을을 벗어났으면 했다. 이 저녁시간 때에는 주정뱅이들이며, 장사치들로 가장 시끄러웠기에 사고도 많았다. 이상한데서 발목 잡히면 피곤해진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고분고분 다리를 놀렸다. 원래라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시간이었다.

“그렇다니까. 또 송장 치르게 생겼어.”

“아이구, 이게 벌써 몇 번째야.”

옆에서 짐을 인 아낙 둘이 수다 떠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는 길이 겹치는 모양인지 듣기 싫어도 말소리가 제멋대로 귀를 타고 들어왔다.

“세 명은 더 죽었지.. 무서워서 어디 살겠어.”

“애들 단단히 잡아둬. 놀다가 산에라도 올라가면..”

“그런 끔찍한 소리 입에 담지도 말어..!”

“그러니까 조심하라는 얘기 아녀! 이 여편네가 손만 매워가지고..”

또 이 얘긴가. 시장을 지나오며 들은 얘기가 죄 똑같아서 새로움이 없었다. 마을 내에 흉흉한 소문이 도는 모양인데 산에서 사람이 죽어 나왔다나 뭐라나. 그다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다 본인의 업일 뿐인데 인간들은 허풍 더해 떠벌리는 것을 유난히도 좋아했다.

산 입구에 들어서, 다시 사부작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위로 올라갔다. 사뿐사뿐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아마 잠을 푹 잔 덕분이었다.

집 근처에 다다를 때쯤 수상한 인기척이 주변을 서성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하늘은 어둑해진 뒤였는데 이런 깊은 산속에 동물도 아니고 낯선 인기척이라니 의심스러운 것이 당연했다.

살금살금 뒤를 밟아보니 여인네의 치렁한 치맛자락이 어슴푸레 보였다. 주변에 빛이 적어 제대로 살피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대략 사람을 구분 지을 정도는 되었다. 머리에 쪽을 지지 않은 걸 보면 아직 앳된 나이임이 분명했다.

여자는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뜻도 없이 어디론가 발을 옮겼다. 정말이지 그 행태가 이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여자는 비틀거리는 몸을 주체 못하고 픽 자리에서 쓰러졌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쯧쯔.”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척보니 몸도 성치 않아 보이는데 험하기로 유명한 이 산자락까지 어떻게 기어들어왔나 싶었다. 엉망이 된 옷 모양에 혀 차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빨갛다 못해 퍼렇게 질려버린 두 뺨에는 미약하나마 온기가 남아있었다. 그냥 못 본체 지나가버리고 싶었지만 고약한 몰골을 보니 심기가 불편했다. 제가 꼭 나쁜 짓을 저지르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힐끗 거리를 가늠해보다 하는 수 없이 여자를 품에 안아들고 집으로 향했다. 들어보니 쑥하고 올라가는 무게에 한껏 미간이 찡그려졌다. 피골이 상접해 옷자락 밑으로 도드라지게 드러났을 갈비뼈 하나하나가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요즘이 그리 어려운 보릿고개도 아니건만 피둥피둥 살찐 두꺼비들을 구경하고 온 오늘은 더욱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에 도착해선 여자를 제 이부자리위에 눕혀두고 한숨을 돌렸다. 체력이 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까슬한 갈증 탓에 들고 온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달달하고 알싸한 것이 죽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고로롱. 고로롱.

미약하지만 태평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여자는 잠이 들었는지 그나마도 편한 얼굴을 하고 꿈속을 헤매고 있었다.




七.

다음날, 새벽도 채 되지않은 이른 시간에 여자가 자고 있던 방문을 열어제꼈다. 여자는 여전히 불쌍한 모양으로 잠에 취해 문여는 소리쯤이야 신경도 쓰지 못하는 듯했다.

밤새 덥혀진 이불을 걷어내고 여자를 품에 안아 방안을 빠져나왔다. 양 팔에 여자를 안으려니 손이 모자라 약초가득 담긴 바구니는 여자의 배위에 슬쩍 올려두었다. 

터벅터벅.

아직은 거무튀튀한 산속을 빠른 속도로 내려갔다. 연달아 두 번씩이나 마을에 내려가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산 초입에 다다르자 마을이 시작되는 초가집이 듬성듬성 보였다. 여자가 사는 곳을 모르니 적당히 아무 집에나 던져두고 갈 요량이었다. 찾을 방법도 없을 뿐더러 애써 찾아줄 의리도 없었다. 한 밤재우고 여기까지 데려다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었다.

덜컹덜컹 몸이 흔들리는 데도 여자는 작은 뒤척임조차 없었다. 이미 다 죽은 시체를 들고가는 것 마냥 얌전했다. 어지간히도 피곤한 모양이었다. 

여자를 내려놓을 집을 찾아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그러자 어제 본 고양이가 다시 제 뒤를 졸졸 따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산까지 따라 들어오지는 않더니만 언제 알고 왔는지 꼬리를 살랑거리며 뒤를 밟고 있었다. 하여간이상한 들짐승이었다.

미야아-

고양이는 저를 알아본 것을 느꼈는지 대뜸 솜방망이를 옮겨 선두를 잡았다. 총총거리는 고고한 걸음새에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홀린 듯이 뒤를 따랐다. 

고양이를 따라 도착한 곳은 분냄새 자욱한 기방이었다. 어쩐지 여자의 몸에서 무언가 탁한 냄새가 난다 했더니 이 기방의 사람인 모양이었다.

고양이는 기방 앞마당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꼬리를 탁탁 쳤다. 미물의 말을 듣자니 순간 기분이 나빠졌지만 순순히 여자를 내려놓고 등을 돌렸다. 이제 상관없는 일이었다. 

고양이는 이번에도 딱 마을이 끝나는 지점까지 따라오다 우뚝 발을 굳혔다. 그리고 그 뒤로 한참을 보이지 않았다. 마을에 내려가질 않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이 있고난지 한 달이 조금 넘어가던 때, 다시 한 번 그 여자를 산에서 마주쳤다. 제 집에 꿀이라도 발라놓은 듯 이번에도 귀신같이 집 근처에서 피를 토하고 쓰러졌다. 길을 알려줘도 찾아오기가 힘든 곳인데 혈혈단신으로 어떻게 올라왔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군다나 하필 날을 골라도 재수가 없었다. 때아닌 폭설이 오는 날이었는데 새하얀 눈이 검붉은 피로 더럽혀졌다. 몸도 불편한 것이 참 겁도 없었다. 제 간이 일곱개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하는 수 없이 또 쯧쯧 혀를 차며 여자를 들어올렸다. 어째 볼 때마다 몰골이 이 모양인지 전보다 나빠지면 나빠졌지 하나도 나아지질 않았다. 가벼운 무게도 여전했다. 입가를 타고 흐른 핏줄기가 더 심각해진 상태를 나타내고 있었다.

포근한 이부자리에 여자를 뉘이고 몇 없는 사림살이를 뒤져 천조각을 찾아냈다. 딱딱히 굳은 피를 살살 물묻혀 닦아내고, 뜨끈하게 아궁이도 덥혔다. 평생 쓸 일 없던 구들장이 긴하게 쓰였다. 

여자가 입고 있던 치마자락은 너무 더러워 끝부분만이라도 싹둑 잘라냈다. 옷이야 얼마든지 구해다줄 수 있었고, 속곳인지 외출복인지 구분도 가지않는 옷이라 벗길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완전히 진흙으로 범벅이 되있던 것을 잘라내니 그나마 좀 나았다. 

치마밑으로 드러난 발목은 보기 흉하게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멀쩡한 반대쪽 다리에 비하면 다른 사람의 것이래도 믿을 정도였다. 딱딱한 부목을 구해와 아래에 두고 남은 천조각들을 엮어 질끈 동여맸다. 임시방편이었지만 아예 없는 것 보다는 나을 터였다.

'또 독초를 캐러와 이 꼴이지. 아둔하다, 아둔해.'

이 겨울산에 꽃 핀 풀이 어디있다고. 여자의 머리맡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찬찬히 얼굴을 뜯어 살폈다. 여전히 허여멀건한 안색에 보는 것만으로도 심기가 불편했지만 괘씸한 마음에 또 보게되는 것이었다.

'저번 날 들려준 것은 한 입도 안먹은 게 틀림없구나.'

애써 모아두었던 약초 한 꾸러미를 주어보냈거늘 이렇게 산송장이 되서 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하다못해 낫지는 않더라도 더 죽을 상을 하진 말았어야 했다. 부양할 가족이라도 있는 건지 그 귀한 것을 장터에 홀랑 팔아먹지 않고서야 이럴리가 없었다. 

탁탁.

한쪽에 처박아둔 담뱃대를 꺼내 까만 재를 털어냈다. 담배를 즐기는 편은 아니었지만 심란한 기분에 이거라도 해야겠다 싶은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전부 아둔한 탓이었다. 아픈 것도,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약초를 버린것도, 픽픽 쓰러지는 것도 전부 여자가 어린 탓이었다. 그래서 이렇게도 가슴이 심란한 것이다.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통안에 채워담고, 불씨를 얻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아궁이에 슬쩍 가져다대니 희뿌연 연기가 폴폴 솟았다.

후우-

한 모금 빨아내자 긴 입김이 엿가락 마냥 늘어졌다. 갑갑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는 색색 잘도 잤다. 부족한 잠을 다 여기서 때우려는 듯 방안에선 조금의 미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 옷 뒤집어 쓴 달밤 아래로 아둔한 구렁이 담배피는 소리만 요란했다.






_4편에서 이어집니다.



꽁치빌라 건물주 twitter: @rin_kkong 에스크&리퀘: asked.kr/krn6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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