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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구쿠로ts] 바람꽃 02


※요괴 스구루×인간 쿠로오 :사극 판타지

※과격하고 부적절한 언어표현 주의

※사극 용어는 익숙치 않은 관계로 읽으시다 틀린부분이나 어색한 부분이 있으면 제보바랍니다.













四.

계례가 있기 이틀 전 날 밤이었다. 조용한 가운데 멀리서 두두두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한 사람, 두 사람, 아니 적어도 세 사람은 되어보였다. 까만 복면을 쓴 이들이 열 맞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소녀는 밤이 늦어서야 잠에 들었다. 자신도 이제 성인이 된다는 설렘에 눈이 말똥말똥 했던 탓이다. 몽중에 무슨 일이 있는지 꿈꾸는 표정에 퍽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계례를 마치고 첫 술을 마시는 발칙한 상상이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발자국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소녀가 자고 있는 집의 대문 앞에 다다랐다. 무슨 일인지 이리 나오라는 붊도 없이 대담한 사내들은 담장을 훌쩍 뛰어 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살금살금 온갖 방문을 젖혀가며 무언가를 찾았다.

곧 한 방문 앞에 검은 복면인들이 차례로 모여들었다. 원하는 것을 찾은 모양이었다. 무리 중 한 사내가 방안에 들어가 나이 든 남자를 어깨에 들치고 밖으로 나왔다. 나머지는 다시 문을 닫고, 남자의 입에 천을 물리며 소리를 봉했다. 아닌 밤중에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었다.

다음날 아침. 아니나 다를까 소녀의 집에는 큰 소란이 났다. 집안의 제일가는 어른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소녀의 하나뿐인 아비가 납치를 당한 것이다.

소녀는 몰려드는 걱정과 두려움에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 아랫것들 앞에서 추태를 부리는 것을 용납지 않는 엄한 어미의 영향이었다.

소녀의 위로 두 명 있는 오라비들은 그런 막내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품에 안아 다독여 줬지만 소녀의 놀란 가슴에 충분한 위로는 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사일 뒤. 소녀의 아비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당당하고 태연하기까지 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왔다. 소녀는 반가운 마음에 신을 신는 것도 생각지 않고 한달음에 달려 나갔다. 아비는 그런 소녀를 안아 살살 등을 쓸어주었다. 축축했던 집안 분위기가 단숨에 구름위로 올랐다. 엄하기만 했던 소녀의 어미도 이번만큼은 크게 혼을 내지 않을 모양이었다.

 


“다 큰 처자가 망측하게 이게 무슨 꼴이람..!”

“거 그냥 놔둬라. 흙바닥이 더 좋은 가보지.”

“쯧쯧, 어쩜 이리 저 같은 짓만 골라 하는지.”

“정말이지 미련하기 짝이 없어.”

사방에서 수근대는 소리가 쿠로오의 잠을 깨웠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동서남북에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어머, 얘 이제 일어났나보다. 너 어서 가서 행수어른 불러 오거라.”

곱게 차려입은 기생 하나가 옆에 있던 시비*를 시켜 행수를 불렀다.

“아고, 행수어른 화낼 거 생각하니 벌써 내 머리가 다 아프다.”

“그러니까 말이야. 이 골칫덩이 덕에 잘난 우리가 다 고생이지 않아.”

“행수어른 명만 아니었어도 저 허연 피부에 시퍼런 멍 자국을 내주는 것을.”

“아서라. 백 영감한테 무슨 짓을 당하려고.”

“맞다. 행수어른도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니니.”

“어휴, 얄미운 것. 그럼 침이라도 뱉어야 속이 시원하겠다.”

철썩. 아직 비몽사몽한 쿠로오의 볼테기 위로 끈적한 것이 떨어져 붙었다. 이성을 차리지 못한 정신에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낄낄대는 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면 썩 좋은 건 아니겠구나 싶었다.

“저기 행수어른 오신다..!”

누군가의 외침에 사나운 메뚜기 떼 마냥 몰려있던 기녀들이 일제히 뒤로 물러났다. 쿠로오 역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섰다. 급하게 일어난 탓에 눈앞이 까매지고 어지러웠지만 다시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쯧쯧.”

행수는 쿠로오를 위아래로 훑어 내리더니 끌끌 혀를 차며 표정을 굳혔다. 원래도 차가운 얼굴에 더욱 냉기가 돌았다. 그럴 만도 했다. 지금 쿠로오의 모습은 아무리 좋게 봐도 거지꼴을 못 면할 정도였다.

“머리는 산발로 풀어헤치고.. 옷에는 온갖 얼룩과 피 칠이라니. 네가 무슨 처녀귀신이라도 된 줄 아느냐.”

행수는 쿠로오의 가슴께를 부채 끝으로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한껏 불편해진 심기가 여과 없이 드러났다.

“누가 보면 아주 간이라도 빼먹고 온 줄 알겠구나.”

“...”

“그 몰골을 하고 동하지도 않겠건만 너 준다는 발정난 수캐라도 찾은 모양이지.”

어때, 백 영감보다 좆질은 잘하더냐. 신랄한 행수의 말투에 쿠로오는 벌겋게 얼굴을 붉혔다. ‘풋’하고 뒤에서 들려오는 비웃음소리는 덤이었다.

“이리 시키는 것 하나 제대로 못하고 사달을 내니 내가 화를 안내고 넘어가겠느냔 말이다. 꼴도 보기 싫으니 소쿠리 내어놓고 썩 방으로 꺼지거라.”

쿠로오는 품에 안고 있던 약초 수북한 소쿠리를 건네고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왔다. 기녀, 하인을 비롯하고 하하 호호 웃는 소리가 돌아선 뒷통수를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쿠로오는 시린 우물물에 더러워진 옷을 빨고, 속곳위에 이불을 둘러맨 채 방안에 틀어박혔다. 다리를 모아 한껏 그러안고 열기가 빠져 나가지 않도록 몸을 둥글렸다. 이불이라고 해도 두꺼운 솜이불이 아니라 얇은 식탁보와 다름없는 것이었지만 쿠로오의 방에 주어진 유일한 살림살이였다.

쿠로오는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한 이마를 양 무릎에 가져다 대었다. 막 깨어났을 때야 정황이 없어 아픈 것도 몰랐다지만 원래도 쿠로오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하물며 하루 종일 산세를 헤매다 차디찬 흙바닥위에서 잠을 잤으니 몸이 멀쩡할 리가 없었다. 그리 자각을 하고나니 온몸에서 ‘나 죽네’ 하고 더 아우성을 치는 것이었다.

그나마도 행수가 쿠로오의 약초를 보고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졌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도 밤시중을 위해 기침 나는 분칠을 받고 있어야 할 터였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참 고마운 이였다. 저를 데리고 험한 산길을 내려왔는가 하면, 이름 모를 약초까지 담뿍 담아 주었으니. 쿠로오는 꼭 사례를 할 수 있길 바라면서 천근만근으로 무너져 내리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五.

꿀꺽꿀꺽.

쿠로오의 가냘픈 목울대를 타고 쌉싸래한 물이 흘러내려갔다. 쿠로오가 밤시중을 들고 온 날이면 매일같이 방문 앞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제 입맛이 쓴 줄 알았더니 원래가 쓴 약초 물이었다. 행수가 기력을 보하는 약이라며 반드시 마셔야 한다고 당부 아닌 당부를 하는 통에 거절할 수도 없었다.

쿠로오가 밤시중을 들기 시작한지도 어언 한 달이 넘어갔다. 야속한 몸뚱아리는 그새 적응을 했는지 주인의 의지는 무시하고 딱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만 힘들어했다. 못난 일이었다. 이렇게 더러운 몸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몸이 나은 것도 아니었다. 약이 효과가 없는 건지, 아니면 약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생활이 너무 고단한 탓인지 쿠로오는 일주일에 두 세 번씩 여전히 각혈을 했다. 한껏 피폐해진 정신하며, 지독하게 붙어있는 어지럼증과 열도 그 중 하나였다. 무엇하나 나아진 것이 없었다.

쿠로오는 사발을 깨끗하게 비우고 그대로 몸을 돌려 행수가 머무르고 있는 별채로 향했다. 밤새 시달리다 와서 피곤할 것이 뻔했지만 행수는 아랑곳 않고 이른 아침부터 쿠로오를 불러댔다.


“하아..”’

잠시 후, 쿠로오는 소쿠리 하나만 안아든 채 터벅터벅 연화루를 나왔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날씨가 꾸물꾸물한 것이 쿠로오의 기분도 같이 바닥을 쳤다.

‘알겠느냐? 그 배다. 꼭 그 두 배여야 한다. 양을 다 채우지 못하면 멍석말이를 할 테니 그전에는 기어들어올 생각일랑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야.’

행수는 삼일간의 허드렛일과 밤일을 면해주는 대신 그동안 저번에 가져온 약초의 두 배를 캐오라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매타작을 해 내쫓을 것이라며 단단히 윽박을 질렀다. 불행한 일이었다. 두 번이나 저번과 같은 요행이 일어날 리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일어난다면야 다반사뿐이지 요행이라 부를 수도 없었다.

쿠로오는 착잡한 마음에 벌써부터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마을 시장의 가세로 꾸물꾸물 발을 옮겼다. 당당히 큰 길로는 다닐 수 없었기에 최대한 구석 길로 몸을 숨겼다.

시장은 우울한 쿠로오와 달리 아주 활기가 넘쳤다. 특히나 주막 근처를 지날 때면 술주정과 사람 사는 얘기로 왁자지껄 귀가 아팠다.

“자네 그 소문 들었나? 저 뒷산에 산다던..”

“천년 묵은 구렁이 말인가? 에잉, 누가 그런 야담을 믿어.”

“글쎄 이 씨네 종놈이 직접 봤다지 않아.”

“허이고, 이 친구야. 나이값 좀 하게. 지나가던 개가 웃겠구먼.”

“어허, 참말이래도! 저번 날에는 박가네에서..!”

자식얘기, 농사얘기, 장바닥에 떠도는 출처모를 소문까지. 모두가 쿠로오와는 거리가 먼 얘기들이었다. 당장 제 목숨이 안절부절한데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쿠로오는 부지런히 움직여 어느덧 산 중턱에 올라갔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꼼꼼히 뒤지며 올라왔건만 여전히 파란색 꽃은 어디에도 제 모습을 비추지 않았다. 애초에 있던 풀도 시들어 떨어지는 겨울 산에서 활짝 핀 꽃을 찾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어둠이 졌다. 해가 땅 밑으로 숨자 기다렸다는 듯 내리기 시작한 함박눈에 쿠로오의 산길을 점점 더 고되지기만 했다.

‘하아..하아..’

가빠지는 숨소리에 맞춰, 빠른 심장 소리가 귓구멍을 울렸다. 시끄럽게 쿵쿵대는 탓에 더 정신이 없었다. 쿠로오는 비틀비틀하면서도 재게 발을 옮겼다. 어쩌피 약초는 글렀으니 이 이상 밤이 깊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 했다.

있지도 않는 삵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까만 산 속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니 마음이 금세 조급해졌다. 불안함에 수십 번 뒤를 돌아봤지만 저를 따라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철퍼덕, 데구르르.

급해진 뜀박질에 어쩔 수 없이 발놀림이 꼬였다. 두껍게 쌓이기 시작한 눈에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보지 못한 탓이었다.

쿠로오는 넘어지는 충격에 엎어진 상태로 쿨럭 기침을 했다. 빨간 피가 눈 위를 적셨지만 주위가 어두워 꼭 검은 먹물이 튀긴 것도 같았다. 쿠로오는 쉽사리 그치지 않는 기침에 위장을 토해낼 듯 각혈을 하고서야 겨우 숨을 골랐다. 이런 몸인데도 아직까지 기절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 새삼 용하게 느껴졌다.

쿠로오는 주르륵 힘이 빠진 몸을 다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넘어질 때 다쳤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발목부터 시큰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올라왔다. 손바닥과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나무에 쓸려 엉망진창 열상이 났다.

쿠로오는 불이 난 듯 뜨거워진 속을 달래며 차츰 몸에서 힘을 빼냈다. 살갗 하나, 내장 하나, 어디 한 군데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쿠로오는 급속히 가라앉은 기분에 더는 을씨년스러운 눈 내리는 겨울 산에 대한 두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근래 들어 자주 변덕을 부리는 기분은 이제 쿠로오 본인조차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

이제 정말 죽겠구나 생각하니 되려 머리가 맑아졌다. 눈은 쉼 없이 내려 얇은 쿠로오의 옷자락위에 쌓이고 바닥에선 냉기가 올라와 배가 시렸다. 이마가 뜨끈해지는 걸 보니 다시 열도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문득, 쿠로오는 저번 날 은인의 존재를 생각해냈다. 자신에게 감사한 요행을 가져다준 이름 모를 인연. 이번에도 이렇게 칠칠치 못하게 자빠져 있는 꼴을 보면 제가 그 은인이라도 혀를 차겠다며 실없는 웃음을 뱉었다.

‘이 무슨 추태인지..’

쿠로오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먹은 게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분 나쁜 기시감이 느껴졌다. 또 다시 허망하게 눈이 감겼다.






_3편에서 이어집니다.



 

꽁치빌라 건물주 twitter:@rin_k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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