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내용으로 건너뛰기

  



 

03.고백

_쿠로오의 시선이 저절로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무슨 일이라도 있냐는 듯 제 아래는 보송한 수면바지에 싸여 몹시도 평화로워 보였다.

 

 

 

9.

다음날, 쿠로오는 폭신한 침대위에서 상쾌하게 눈을 떴다. 덮고 있는 이불은 보송하고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았고, 머리도 무겁지 않고, 열도 나지 않았다. 더할 나위 없는 몸 상태였다. 딱 한 가지 지금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안을 사람’ 정도였다. 늘 눈뜨면 제일 먼저 보이던 아카아시가 보이지 않았다.

아카아시의 침대는 그렇게 크지 않았다. 두 명이 자면 좀 좁고, 한 명이 자기엔 그럭저럭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혼자 누워 있으니 편해야 맞는 것인데 따뜻하게 안고 있을 게 없으니 팔, 다리가 외로웠다.

결국 쿠로오는 아카아시를 찾아 한겨울 이불의 유혹을 이겨내고 방을 나섰다. 차가운 복도 바닥을 걸으려니 발이 조금 시렸지만 참을 만했다. 원래 더 차가운 곳에 살았었으니 이 정도 추위쯤이야 별 것도 아니었다.

쿠로오는 계단을 통해 거실로 내려갔다. 아침이면 아카아시는 밥을 준비하기위해 항상 부엌에 있었다. 오늘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아카아시..?”

쿠로오의 고개가 갸웃하고 꺾였다. 부엌은커녕 1층 어디에도 아카아시가 보이지 않았다. 쿠로오는 의아함에 눈썹을 찡그린 채 식탁 앞으로 향했다. 차려준 이는 없었지만 맛있는 밥상은 차려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생선냄새가 솔솔 풍겨오고 있었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의 사랑하는 꽁치였다.

쿠로오는 쪼르르 식탁 앞으로 달려가 그 위를 확인했다. 꽁치 한 마리에 미소국과 하얀 쌀밥, 그리고 각종 나물까지. 음식들이 정갈한 접시에 담겨 저마다의 매력을 뽐내고 있었다. 군침이 돌았다. 생각해 보니 어제 저녁에도 아무것도 먹은 게 없었다. 더 배가 고파왔다. 쿠로오는 홀린 듯 자기 자리에 가 앉았다. 아카아시는 먼저 먹은 건지 밥그릇이 딱 하나뿐이었다.

숟가락을 들어 가장 먼저 밥을 먹고, 반찬거리를 탐색했다. 다른 반찬들도 맛있어 보이긴 했지만 역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꽁치였다. 쿠로오는 야무지게 젓가락을 쥐어들고 통통한 뱃살위로 손을 옮겼다.

푹.

젓가락이 들어감과 동시에 꽁치에 두 개의 작은 구멍이 생겼다. 그리고 그 상태 그대로 쿠로오는 더 이상 손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젓가락을 너무 야무지게 쥔 탓이었다. 생수병을 잡듯 그저 두 젓가락을 감싸 쥐었으니 당연히 살을 발라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동안은 아카아시가 하나하나 발라준 덕에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지만 그가 없고 나니 이제야 후회가 몰려드는 쿠로오였다.

‘아카아시 말대로 연습 열심히 할걸..’

맛있는 꽁치를 앞에 두고 먹을 수가 없다니. 쿠로오의 얼굴이 울상이 됐다. 배는 고프고 양 볼엔 밥이 빵빵한데 차마 삼킬 수가 없었다. 살을 바르려면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했는데 지금의 쿠로오는 제대로 젓가락을 쥐는 것조차 못했다. 가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손으로 발라먹을 수도 없었다. 아카아시가 음식은 꼭 수저로 먹어야 한다고 말해줬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었다. 그 말을 어기고 싶진 않았다.

‘꽁치...’

쿠로오의 눈초리가 점점 아래로 축 쳐졌다. 여기 있는데, 바로 눈앞에 있는데, 먹을 수가 없다니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입안의 밥은 이제 눅눅하다 못해 축축해질 지경이었다.

띠리릭.

쿠로오가 심각한 내적 갈등에 휩싸여 있는 동안 잠시 밖에 나가있던 아카아시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한 손에 들린 전화기를 보니 통화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쿠로오?”

“으므으이!”

“언제 일어났어? 좀 이따 깨우려고 했더니 일찍 일어났네.”

쿠로오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꽁치를 발라줄 구세주의 등장이었다.

아카아시가 발라준 살로 뚝딱 아침을 해치우고 쿠로오는 부른 배를 두드리며 푹신한 소파위로 자리 잡았다. 아카아시 역시 쿠로오가 일어나기 전에 본인 몫의 식사는 끝낸지라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는 부엌에서 잘 익은 사과 하나를 꺼내 그릇에 내었다.

“쿠로오, 사과.”

아카아시가 거실 테이블 위에 들고온 사과 접시를 놓으며 말했다. 쿠로오가 포크에 꽂힌 사과를 한 입 베어물자 상큼한 사과향이 입안에 터졌다. 잘 보니 노랗게 꿀이 박힌게 맛있을 만도 했다.

“..쿠로오.”

“응?”

사과 한 쪽을 다 먹어갈 무렵 잠시 머뭇거리던 아카아시가 조심스레 쿠로오의 이름을 불렀다.

“왜?”

“..이제 몸은 괜찮아?”

“몸? 아...”

아카아시의 질문에 쿠로오는 잠시 멍한 듯 작게 입을 벌리고 얼굴을 굳혔다.

‘몸..맞아.. 몸이 안 좋았었는데..’

쿠로오의 시선이 저절로 허리 아래로 내려갔다. 무슨 일이 있냐는 듯 제 아래는 보송한 수면바지에 싸여 몹시도 평화로워 보였다.

“쿠로오..?”

“...아카아시.”

“응.”

“아무래도 ‘그거’였나봐..”

“‘그거’?”

쿠로오는 이제야 알겠다며 갑자기 마구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몸 여기 저기를 마구 더듬더니 곧 입고 있던 티셔츠도 훌훌 벗어 던졌다.

“쿠로오, 갑자기 옷은 왜 벗어?”

“아카아시, 나 화장실!”

“쿠로오는 의아해하는 아카아시를 내버려 둔채 1층 화장실로 뛰어갔다. 쾅.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 졸졸 거리는 세면대 수도꼭지 소리도 들려왔다. 아카아시는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싶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뛰어다니는 걸 보니 몸은 좀 괜찮아 보이는데 알 수 없는 물소리만 들리니 이건 이것대로 또 불안하기는 했다.

뚝.

하지만 아카아시의 걱정이 무색하게 물소리는 금세 끊겼다. 그리고 왠지모를 긴장감이 휘도는 정적이 이어졌는데 그것마저도 개운한 표정으로 화장실을 나오는 쿠로오덕에 바로 깨지고 말았다.

“..?”

쿠로오를 바라보는 아카아시의 미간이 살짝 찡그려져 있었다. 어제부터 정말 이해가 안가는 일들 투성이었다.

“아카아시. 나 이제 여기서 살아야 돼.”

“응?”

그래. 사실 처음 만날 때부터 이해 안가는 일 투성이였다.

 



10.

쿠로오의 민망한 사건을 계기로 아카아시는 그에 대한 이해가 한 층 깊어졌다. 첫만남이 왜 그랬는지, TV는 왜 몰랐던건지, 젓가락질은 왜 못 했는지도 이젠 모두 받아들일 수 있었다. 처음 그 얘기를 들었을 때는 당연히 믿기 힘들었지만 쿠로오의 몸에 있던 ‘그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진짜였다. 그렇게 한 번 받아들이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훨씬 쉬웠다. 원래도 그의 작은 어리광들을 싫어하지 않았으니 더욱 그랬다.

“쿠로오, 다 끝났어?”

“응.”

오늘은 시내에 나가는 날이었다. 이번에는 아카아시 혼자가 아닌 쿠로오도 같이였다. 나갔다 온지 며칠도 지나지 않았지만 무르지 못할 약속이 잡혀버려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옷 입어. 나가자.”

쿠로오가 보고있던 TV를 끄고 외투를 챙겨들었다. 아카아시가 입던 외투라 사이즈가 그리 딱 맞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입을 만했다. 푹 덮어쓴 모자 아래로 새까만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왔다.

“이리와 봐. 밖에 바람 많이 부니까 목도리도 하고 가.”

쿠로오가 고분고분 그 앞으로 가자 아카아시는 목 사이로 바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꼼꼼히 지퍼를 여며주고 두꺼운 목도리까지 둘러주고 나서야 제 옷을 챙겨 입었다. 하필 오늘같이 추운 날 오라고 해서 사람을 귀찮게 했다. 덕분에 처음 집밖을 나가보는 쿠로오만 신이 났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자 문 앞에 차 한 대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카아시의 차였다.

“쿠로오, 여기 타.”

“이게 아카아시 차야?”

“그래. 추우니까 얼른 타.”

쿠로오를 조수석에 태운 아카아시는 반대편으로 돌아 자신은 운적석에 몸을 실었다. 미리 차안을 덥혀둔 덕에 그나마도 별로 차가운 느낌은 없었다.

달칵.

문이 닫히고 둘을 실은 차는 곧 시내를 향해 산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드라이브 내내 쿠로오는 신기한 듯 창문에 딱붙어 휙휙 지나가는 풍경을 즐겼다. 후운 겨울이라 단풍도 다 지고 이렇다할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차’에 타서 보고 있다는 사실 자체로 그의 흥미를 끌 요소는 충분했다.

짧았던 드라이브가 끝나고 차는 한 병원 주차장에서 멈춰섰다. 평소에는 지루하기만 했던 길이 눈깜짝할 새에 지나갔다.

“쿠로오, 다 왔어.”

“벌써?”

“응, 내려. 잠깐 볼 일 보고 옷 사러 가자.”

“알았어.”

아카아시는 차문이 잠긴 것을 확인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쿠로오는 사람 많은 게 신기하면서도 무서운지 아카아시의 외투 끝자락을 집게손가락으로 야무지게 쥐고는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안녕하세요. 지금 위에 계십니까?”

“아, 아카아시씨! 오랜만에 오셨네요. 선생님 아마 계실거예요. 방금 진료가 끝나셔서.”

“네, 감사합니다. 쿠로오, 올라가자.”

아카아시는 익숙한 듯 안내데스크의 직원과 인사를 나누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시골이긴해도 나름 규모가 있는 병원이라 4층까지 올라가려면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엘리베이터는 바로 1층에 멈춰섰다. 쿠로오는 이것도 드라마에서 봤다며 상기된 표정으로 그 안에 발을 들였다. 종일 집안, 마당, 집안, 마당만을 맴돌다가 이렇게 나오니 TV에서만 보던 것들도 직접 보고 반짝반짝 떠진 눈이 감길 새가 없었다.

4층 복도를 걸어 아카아시는 한 진료실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오이카와 토오루. 정신과 전문의’

이 진료실 담당의의 명찰이었다.

“쿠로오. 잠깐 여기 앉아있어. 금방 나올게.”

아카아시가 진료실 앞 대기석에 쿠로오를 앉히며 말했다.

“응. 빨리 나와.”

아카아시는 쿠로오의 모자 위를 한차례 쓰다듬어 주고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금방 나온다고는 했지만 아마 그렇게 빨리 끝내지는 못할 터였다.

‘그동안 가만히 앉아있으면 좋을텐데..’누가 과자라도 준다고하면 쪼르르 따라가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저 왔습니다.”

“아카아시! 기다리고 있었다고. 그 애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얀 가운이 아닌 캐주얼한 복장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부드러운 갈색 머리에 샐쭉 휘어진 눈꼬리가 한눈에 보기에도 매력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

“빨리 할거나 하시죠.”

“같이 안왔어?”

“불필요한 관심은 꺼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아니지. 네 정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잖아. 주치의로서 알아야할 필요성이 있어.”

“펜이나 주시죠. 제대로 쓰고 갈테니까.”

“답지않게 왜 그렇게 급해? 좀 더 느긋하게.. 헤에-”

“왜 그렇게 보세요.”

“밖에 있구나?”

아카아시의 한숨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귀찮음이 가득 묻어나는 표정이었지만 눈 앞의 남자는 별로 개의치않는 듯 했다.

“역시 데리고 올 줄 알았어. 내가 선물도 사놨다고?”

“그냥 평범하게 진료만 볼 수는 없는 겁니까..”

“어떻게 그래- 아끼는 후배님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데.”

“후배는 무슨.. 제가 당신 속을 모를 것 같아요?”

“흐응- 알면 빨리 소개나 해주지? 기다리게 하지말고. 내가 같이먹으려고 마카롱도 사다놨는데 말야.”

남자는 이거 보라며 책상 아래 고이 놓여있던 하얀 박스 를 들어올리며 말했다. 한쪽에 붙어있는 비닐 덕에 안쪽의 내용물이 훤히 보였다. 정말 마카롱이었다.

“단 것도 잘 먹는다며. 얼른 불러와. 이쁜 손님을 밖에 두면 쓰나.”

“하아.. 건들지 말아요. 이상한 말도 하지말고.”

“성인이라면서 뭘 그렇게 싸고 돌아.”

“..아직 애예요.”

“성인이라며? 아카아시 너..”

“쓸데없는 상상은 집어치워요.”

짜증섞인 목소리로 말을 끊은 아카아시는 쿠로오를 데려오기위해 다시 진료실 문을 열었다.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역시 귀찮은 타입이었다. 그 능글맞은 성격덕에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늘 휩쓸리기 일쑤였다. 바로 지금처럼.

드르륵.

문이 열리고 아카아시는 쿠로오가 앉아있을 왼편 대기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눈 앞에 있는 것은 쿠로오가 아닌 텅 빈 의자 몇 개 뿐이었다.

 




11. [ 우리집 인어 사전2: 인어는 냄새를 잘 맡습니다 ]

아카아시가 혼자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 버리자 쿠로오는 5분도 채 되지않아 엉덩이가 근지러웠다. 언제 또 다시 나올지도 모르는데 가만히 앉아만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것 같았다. 그래도 아카아시가 금방 나온다니 참고는 있는데 점점 어딘가 초조해서 애꿎은 다리만 동동 굴렀다.

‘아카아시. 빨리 나와.’

쿠로오는 곧 알 수 없는 초조함의 정체를 확정지었다. 화장실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번 가고, 점심 먹고도 갔었어야 하는데 놓쳤던 드라마 재방송이 있어서 까맣게 잊고있었다. 한 번 자각하고나니 더 요의가 심하게 느껴졌다. 화장실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는데 아카아시는 나올 생각이 없고 쿠로오 홀로 긴박한 시간이었다.

‘아카아시이..’

쿠로오의 다리가 잘게 떨렸다. 나오려는 것을 꾹 참으려 무의식중에 다리를 흔드는 중이었다. 상체가 절로 숙여지고 온몸이 배배 꼬였다. 여기서 더 참으면 배도 아파올 것 같았다.

“저기..”

“..?”

참다못한 쿠로오가 아카아시를 부르기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그 때, 처음보는 남자 한 명이 말을 걸어왔다. 방금전까지만 같았어도 잔뜩 경계했을지 모르지만 당장 볼일이 급한 쿠로오에게는 그럴 정신이 없었다. 아카아시를 대신해서 화장실을 물어볼 수 있으니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어디 아프..”

“여기 화장실 어디..있어요?”

“화장실이요?”

끄덕끄덕. 꽁꽁 싸맨 목도리 사이로 눈동자 두 개만이 빼꼼 보였다. 남자는 잠시 갸웃하는가 싶더니 흔쾌히 데려다주겠다며 쿠로오를 일으켜 세웠다.

잠시후, 화장실에서 나온 쿠로오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급한 일이 해결되기도 했지만 갑갑했던 목도리도 풀어헤치고 모자도 벗어버리니 뜨뜻하게 올라왔던 땀이 식어 점점 개운해졌다. 금방 나갈줄 알고 그냥 두었는데 이럴줄 알았으면 진작 벗어놓을 걸 그랬다.

“이제 괜찮아요?”

화장실 앞에는 쿠로오를 데려다줬던 남자가 서 있었다.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지금보니 하얀가운이 인상적이었다. 이곳 의사들 중 한 명인 모양이었다.

“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쿠로오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니예요. 뭘 이정도 가지고.. 많이 급했나봐요?”

남자가 사람좋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처음보는 상대인데도 살갑게 말을 걸어오는 걸보니 조금 딱딱해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친화력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았다.

“네. 조금..”

“그래도 아픈게 아니라 다행이네요. 계속 끙끙거리고 있길래 어디 아픈줄 알았어.”

“어..죄송합니다? 아닌데..음 감사합니다..?”

“쿡, 아니 감사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고. 뭐.. 그렇게 고마우면 과자사줄까요?”

남자가 씩 웃으면서 쿠로오에게 물었다. 능글맞게 휘어지는 입꼬리에 장난끼가 가득했다.

"아니다. 내 진료실 가볼래요? 맛있는 거 많은데. 따뜻한 핫초코도 있어요."

"핫초코..?"

핫초코라는 말에 쿠로오의 귀가 쫑긋했다. 아카아시가 종종 타주긴 했지만 너무 단 것은 몸에 안 좋다며 많이는 마시지 못했었다. 맘같아선 하루 3번 꼬박꼬박 먹고싶을 정도였다.

"단거 좋아해요? 다른 것도 많아요. 젤리도 있고, 초콜릿도 있고."

"초콜릿..!"

쿠로오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점심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으니 딱 간식먹기 좋을 때였다. 계속 기다리고 있기에도 심심했다. 하지만 아카아시와 약속한 것이 역시 마음에 걸렸다.

"잠깐 들렀다만 가요. 내가 다시 데려다 줄테니까."

"안되는데..가만히 있으랬는데.."

"아직 기다리는 사람 안나왔잖아요. 내가 좀 아는데 아마 오래걸릴거예요."

"빨리 나온다고 했어요.."

"근데 아직도 안나왔는걸. 저기 봐봐요. 안나왔지?"

남자가 아카아시가 있는 진료실쪽 복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텅 비어있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한 명이 없어 더 비어있게 느껴졌다.

"..핫초코만 먹고 갈거예요."

"큭큭, 그래요. 바로 데려다 줄게요."

쿠로오는 결국 남자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핫초코의 유혹은 생각보다 위험한 것이었다.

“아 뜨..”

“천천히 마셔. 혀 다 데이겠다.”

남자의 이름은 ‘마츠카와 잇세이’라고 했다. 나이도 쿠로오보다 훨씬 많았는데 아카아시보다도 한 살 위였다.

쿠로오는 뜨거워진 입안을 식히려 옆에 있던 과자를 집어먹었다. 바삭하고 씹히는 식감이 그런대로 괜찮았다.

“어..마츠카와씨? 마츠카와 선생님?”

쿠로오가 과자를 우물거리며 마츠카와를 불렀다. 화장실도 데려다주고 따뜻한 곳에 앉아 과자랑 핫초코까지 내어주다니 이미 작디작은 경계심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익숙한 바다향이 났다.

“음..둘다 별론데? 형해봐 형.”

“..마츠카와 형?”

“큭. 좋네. 왜 불러 쿠로오?”

마츠카와는 맞은편 의자에 앉아 어딘가 흐뭇한 표정으로 쿠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심히 과자를 집어먹는 모습이 퍽 귀여웠다.

“형한테 바다냄새나요.”

“아아. 그럴만 하지. 다음에 알려줄게. 여기 자주 와?”

“아니요. 오늘 처음 왔어요.”

“또 올거지? 다음엔 더 맛있는거 사다놓을게.”

두 사람의 대화가 도란도란 이어지는 동안 아카아시는 쿠로오를 찾아 명원 한 바퀴를 뒤졌다. 오이카와도 함께였는데 어디에도 쿠로오의 모습이 보이지않아 애가탔다.

“하아..아카아시 숨차.. 좀 천천히..”

“빨리 찾기나 하시죠. 역시 데리고 오는게 아니었는데..”

아카아시가 입술을 짓이기며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뒤에서 지쳐있는 오이카와는 안중에도 없어보였다.

“어머, 선생님. 여기서 뭐하세요?”

1층 로비에 다다르자 안내데스크의 간호사가 오이카와의 초췌한 모습에 놀란 듯 말을 걸었다.

“..하하 누굴 좀 찾느라요. 혹시..”

“혹시 아까 저랑 같이온 사람 못 보셨나요? 갑자기 사라져서.”

아카아시가 오이카와의 말을 끊고 재빨리 물었다.

“아.. 그 분.. 아까 마츠카와 선생님이 데리고 가시던데..”

“어디로요?”

“2층 진료실이요. 엘리베이터 타고 가시면 바로 오른편에 있어요.”

“감사합니다.”

아카아시는 간단한 목인사를 마치고 바로 엘리베이터를 향했다. 뒷모습이 다급해보였다.

‘2층에서 바로 오른쪽..’

간호사의 말대로 몇 발자국 걷지않아 문에 적혀있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마츠카와 잇세이.’ 무슨 일로 쿠로오를 데리고 갔는지는 몰라도 조금이라도 이상한 짓을 했다면 용서는 없었다.

진료실 문 가까이로 다가가자 벽너머로 쿠로오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이 확실했다.

“진짜예요. 여기 엉덩이위에..다니까!”

‘엉덩이..?’

아주 작은 소리라 드문드문 중간이 끊겨들렸다. 알 수 없는 대화내용에 아카아시의 얼굴이 절로 문 가까이에 붙었다.

“나도.. 엉덩이..보고싶네. 언제쯤 볼 수 있으려나..”

“나는..줬는데.. 보여줄거예요.”

‘쿠로오..? 보여줘? 엉덩이를..?’

아카아시의 눈동자가 점점 더 혼란에 휩싸였다.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래. 나중에.. 꼭 다시와. 시간이..걱정..”

“아..벌써..안되는데..아카아시..”

“괜찮아. 아직 멀었..”

“하아.. 아카아..!”

“조용히해요.”

집중해서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아카아시 곁으로 씩씩대는 오이카와가 뛰어왔다. 큰 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려던 것을 한 손으로 막고 조용히 하라며 손가락을 입에 대어보였다.

‘왜? 무슨 일인데?’

아카아시의 진지한 눈초리에 오이카와의 말소리가 단번에 낮아졌다.

‘...’

“그렇게.. 좋아?”

“네.”

“큭큭, ..형이 좋아? 꽁치보다도?”

“네에..//”

“쿠로오 귀엽네.”

덜컥.

문이 열리고 동시에 우당탕 소리와 함께 아카아시와 오이카와가 안으로 들어왔다. 넘어지는 소리는 오이카와의 것이었다.

“아카아시..?”

쿠로오가 놀란 토끼눈이 되어 아카아시를 바라봤다. 아카아시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쿠로오. 내가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잖아. 얼마나 찾았는지 알아?”

“아니, 그게..”

“빨리 일어나. 바로 집으로 갈 거야.”

“아카아시..화났어..?”

쿠로오가 그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한 번도 이런 적 없었는데 처음보는 아카아시의 차가운 표정이었다.

“그래.”

“..!”

“그러니까 얼른 나와. 더 화나기 전에.”

“아카아시..내가 잘못..”

“쿠로오.”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깔렸다. 쿠로오는 두려움에 울컥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꾹 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야할 시간이었다.

“형. 나 갈게요. 다음에 봐.”

“..그래. 얼른 가봐.”

쿠로오는 마츠카와에게 인사를 마치고 아카아시와 함께 빠른 속도로 진료실을 벗어났다. 상황파악이 덜 된 오이카와만 그 모습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혼나겠네. 쿠로오.”

“..맛층. 쟤 알아?”

“아니. 오늘 처음 봤다.”

“근데 이름도 알아? 쟤는 맛층한테 형, 형하고?”

“뭐..화장실 찾아주다가. 그래도 다 들었으면 괜찮긴 하겠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카아시 애인이라길래 한 번 보려고 했더니. 얼굴 보자마자 가버리고..아, 마카롱 안줬는데..!”

“마카롱? 그거 쿠로오거였어?”

“어. 점수 좀 따려고 사다놨더니만..”

“그럼 나줘. 니로 갖다주게.”

“내가 먹을 거거든!”

“이따 가지러갈테니까 잘 챙겨놔. 나 먼저 간다.”

“아씨, 내가 먹을 거라고-!”








+ 웹에는 나머지 03-2와 2부에서 한,두편정도 더 샘플로 올릴 생각입니다:)


>> http://posty.pe/8pqc1k <<



 

꽁치빌라 건물주 twitter: @rin_kkong(101)

린꽁치 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

댓글